침대

김완하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시인)l승인2017.05.2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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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훤(1987~ )

직장을 나선다 
귀가하자마자 가방을 던져놓고 쓰러진다
누워 있으니 사방이 들풀이다 
숲이 흔들리는 소리는 좋은 자장가
어떤 생각은 베개 같다 
안도 같은 향기 때문에 저녁이 자란다
담요처럼 깔린 자유를 덮고 
풀 되어 낮게 눕곤 했다
침대에서 자주 산바람을 맞았다

밤이 온다
꿈꿀 때마다 몸이 바다 위에 떠 있다 
두 평 남짓한 매트리스를 타고 
과거와 미래로 자주 향했다 
얼어붙은 해면 덕분에 어떤 날은 아침으로 돌아왔다
가라앉던 나를 습관처럼 마주친다

알람이 울린다
머리맡 성경을 피면 
얼어붙은 바다로 빛이 내리쬐고
녹는 일에 익숙해져 간다 
새벽을 닦을 때마다 바다가 성소로 변했다
숨겨주었던 괴수의 자리를 지우고
입술이 빛을 자주 말할 것이다
침대 주위로 떨어져 있는 하늘을 몇 점 줍는다

직장으로 향한다

 

▲ 김완하 교수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 라는 카피가 있었다. 침대는 과학이라고. 그런데 이 시의 침대는 반환점이다. 직장을 나서서 반환점을 돌아 다시 직장으로 향하는 그 중간 지점. 침대는 언제라도 직장과 직장 그 가운데에 놓여있다. 그래서 어느새 우리 삶은 단지 침대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각박함 속에 묻힌 셈. 그게 감옥이 아닌가. 그만큼 우리는 소셜 네트워크에 갇혀 나의 자의식을 지우고 살아가야 하는지 모른다. 이 시의 문맥은 ‘직장을 나선다, 밤이 온다, 알람이 울린다, 직장으로 향한다’로 통한다. 네 개의 단문으로 연결되는 시간의 지속은 한마디로 직장과 침대 사이를 오가는 과정인 셈. 네 개의 순서를 바꾸어도 우리에게 언제나 결과는 똑 같다.

발레리는 시의 첫 행은 신이 내려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직장을 나선다는 첫 행으로 시작되는 시. 그 다음이 침대이고, 이어서 밤이 온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은 여지없이 알람이 울린다. 이제 휴식은 끝나버리고 누구든지 곧바로 직장으로 날아가야 한다. 누구라도 밀실의 작은 자유로부터 맹수의 정글로 출동해야 하는 것. 생은 결국 ‘직장을 나선다’와 ‘직장으로 향한다’로 통하는 길이니. 침대의 자유도 따지고 보면 자유가 아니고. 다만 직장으로 가기 위한 시간을 기다리는 순간일 뿐. 침대 찍고 직장을 오가는 게 바로 우리의 위대한 삶?


김완하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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