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에서

김완하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l승인2017.12.17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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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숲에서 
                안도현(1961~ )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 마음 속 헛된 욕심이며
보잘 것 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발 속에다
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돌아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 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
그때까지 내 할 일은
머리 끝까지 눈을 뒤집어쓰고
눈사람 되어 서 있는 일입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 겨울 숲으로 다가갈 때 되었다. 거기에 가서 작은 빈터를 찾아 우리도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릴 때가 되었다. 숲에는 첫눈이 온다고 했으니. 첫눈이 내리는 날은 그대가 온다고 했으니. 기다리는 것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겨울은 버리는 것이라 말만 하는 사람들 곁에서 나무들은 그것을 천번 만번이나 보여준다. 하나도 남김없이 비우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나무들. 참나무, 자작나무 그 옆에는 오리나무도 마른 가지로 더욱 깊은 겨울을 길어 올리고 있다.

▲ 김완하 교수

그러나 겨울은 그저 계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고난, 더 나아가서는 시대의 불운과 절망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지난 시절에 다가왔던 폭압과 어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모든 겨울과 맞서며 견디어 왔던 것. 그런데 그 겨울 숲에서는 매번 겨울마다 첫눈을 맞이하곤 했는데. 우리가 겨울을 맞이하지 않는다면 우리 어찌 함박눈을 맞으며 그대를 기다릴 수 있을까. 자세히 보면 눈은 우리의 모든 길을 지워버리고 새 길을 만들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겨울나무 곁에서 머리끝까지 눈을 뒤집어쓰고 눈사람이 되어 서있는 것이고.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다.


김완하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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