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동락(善政同樂)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건축가)l승인2018.10.1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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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김억중

어느 날 파리 5구 판테온 근처를 거닐다가 평소 못 보던 정류장 표시가 세워져 있기에 가까이 가 확인 해보니 프랑수와 미테랑(François Mitterand, 1916-1996) 대통령 서거 10주년을 기념하는 건축기행 버스가 하루 4차례 운행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어 자못 놀랐다. 고인이 된 대통령의 건축행적을 기리는 행사치고 얼마나 뜻 깊고 멋진 일인가.

역시 “역사는 건축으로도 쓰는 것”이라 고 말했던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나라다운 발상이다. 14년 재임기간(1981-1995) 동안 그가 심혈을 기울였던 파리 그랑 프로제(Paris Grands Projets), 국책사업 일환으로 기획되었고 강력하게 추진되었던 루브르 박물관 피라미드, 라 데팡스 개선문, 바스티유 오페라 대극장, 프랑스 국립 도서관 등을 순회하는 프로그램이었으니, 내겐 여러모로 감회가 깊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언뜻 보면 당연한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이든 하드웨어(기념비적인 건물들)와 소프트웨어(기념하는 방식과 프로그램)를 결합시켜 문화자산의 가치를 높이려는 의지가 없다면 그런 기획이 가능했겠는가. 놀라운 것은 지금 이 건물들은 모두가 예외 없이 20세기말을 대표하는 명품 건축물로 남아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미테랑 대통령이후 그만큼 건축을 정사의 도구로 삼아 국익과 공공의 선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지혜롭게 쌓았던 이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은 듯하다.

어쨌든 미테랑 대통령도 예외일 수는 없었겠지만 대부분의 위정자가 대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자칫 정부의 재정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온갖 논란과 구설수에 오르기 십상이어서 여간한 리더쉽 없이는 도모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규모가 크든 작든 건축을 정치의 한 축으로 소중하게 여겨 백성의 삶의 질을 높이려 했던 위정자들의 실천 사례들은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세조 14년(1468), 변후 심(卞侯鐔)이라는 선비가 개령(開寧)이라는 작은 현의 수령으로 부임했다. 그 곳은 네 고을의 요충지로서 마중하고 배웅하며 접대하는 음식과 물품을 마련하는 일이 실로 번거롭고 복잡하여 능력이 뛰어난 인재가 아니면 그 책무를 감당하기가 어려운 곳으로 알려졌다. 다행히도 땅이 비옥하고 토질이 벼농사에 맞는데다 홍수나 가뭄의 재해도 없는 편이어서 넉넉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이 꽤 많았다.

백성을 돌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번잡한 행정 업무도 줄어들자, 변후는 날마다 들에 나가서 백성들의 농사일을 권면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곤 했다. 한가할 때는 기쁜 마음으로 관리들을 거느리고 산천을 구경하면서 속을 후련히 씻어 내곤 하였는데, 하루는 객관 동쪽 수백 보쯤 되는 곳에 나지막한 언덕  하나를 발견했는데, 마치 자라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불룩 솟아 있었고 비교적 평탄하여 집을 지을 만했다 한다.

변후는 날마다 동락정에 올라 사철의 농사 상황과 논밭에서 일하는 백성들의 고생을 살펴,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지원해야 할지를 미리 헤아려 정사를 펼치니 백성들 모두가 즐거워하였다. 사신들이나 관찰사의 순행이 빈번할 때에도 이곳에 모여 손님과 백성 모두가 즐길 만 했던 것은 동락정 주변의 절경도 한몫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동락정의 참다운 가치는 무엇보다도 누대나 정자야말로 위정자의 평정심을 다스리기에 적절하고도 꼭 필요한 장소여야 한다는 점이었으니, 기문에서 사가 서거정[1420-88] 선생은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대저 누대나 정자를 짓는 것은 단지 아름다운 경치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왕인(王人)을 높이고 빈객을 접대하고 시절을 살피고자 해서이다. 하물며 군자가 노닐고 쉬는 곳을 높고 밝은 장소에 두는 것은, 기운이 울적하지 않도록 하고 뜻이 응체되지 않도록 하며 보는 것이 막히지 않고 듣는 것이 막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누대라는 것이 또한 어찌 정사를 하는 도구가 아니랴.

동락정은 오늘로 치자면 시내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시청사 제일 꼭대기 층에 공공공간을 두어 시장은 수시로 이곳에 들러 시정을 구상하고 시민들을 만나 무엇을 함께 도모해야 할지, 민의를 수렴하여 정책을 세워나갈 수 있는 창조적 공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시장 자신의 의식 영역을 크게 넓혀 거시적 안목으로 공공의 선을 위한 지혜를 취할만한 스케일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요, 온갖 민원에 치여 자칫 잃기 쉬운 심상을 고요한 가운데 맑게 다스려 공평무사한 정사를 활달하게 펼치기 위해서도 더 없이 소중한 도량이라 할만하다.

동락정이 지어졌던 시기에 놀라운 것은 그 누정을 가보면 누가 어떻게 즐기며 누리는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위정자의 정치역량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백성의 안녕과 태평의 기상을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척도였다는 점이다.

국가가 융성하고 태평한 시대를 만나, 관리들은 법을 잘 지키고 백성들은 평안하며 시절은 화평하고 농사는 풍년이어서 모든 민가가 안정되고 사방 경계에 근심이 없으니, 만약 정자에서 노닐며 관광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태평의 기상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 지금 변후는 은택이 백성에 미치고 백성은 성심으로 믿어서, 태수는 백성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고 백성도 태수의 즐거움을 즐겨서 위와 아래가 즐거움을 함께함을 내가 이 정자에서 알 수 있었다. 정자의 이름을 ‘동락’이라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고 보면 공공청사부터 위정자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나 시민들을 위해 얼마만큼 잘 쓰고 있는 지, 그 동락(同樂)의 현장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도 그의 그릇과 됨됨이를 판단할 수 있는 훌륭한 지표가 아니겠는가.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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