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감각의 제국

김억중 한남대 건축학부 교수l승인2016.06.1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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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억중 교수 삽화

자연은 견성정(見性情)의 대상이다. 그 대상 앞에서 집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할까? 많은 시들은 집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의 감각적인 대상들을 즐겨 노래한다. 

"빈창에 눈보라 치고
촛불 그물거리는 밤
달빛에 걸러진 솔 그림자
지붕머리에 어른댄다.
방 깊어 알괘라!
산바람 지나가는 줄.
담 너머 서석거리는
으스스 댓잎소리..."
(이우, '눈보라 치는 밤에', 1469-1517)

놀랍게도 시 속에는 집이 없다. 시인도 자신의 집에 살았으련만, 그의 집은 온데 간 데 없다. 존재는 있으되 그 모습이 온전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있다면, 창이나 툇마루나 정자, 지붕만이 정경 속에 묻혀있을 뿐... 집은 바람, 구름, 달과 새와 함께 배경으로 존재한다. 집은 그들과 하나다. 시인에게 집 자체는 대상이 아니었나 보다.

옛 선비들은 작은 집에 청빈하게 사는 것을 덕목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를 일컬어 근근히 비를 가린다는 뜻의 비우(庇雨)사상이라 하는데, 일례로 '지봉유설' 등 명저를 남긴 석학 이수광이 그 사상과 유적을 남기기 위해 주춧돌 위에 조촐하게 초우를 복고하여 그 당호를 비우당(庇雨堂)이라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그와 같은 사상은 '십 년을 경영하야 초려삼간 지었나니/ 반 칸은 청풍이요 반 칸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라고 노래한 사계 김장생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집은 비워져 있고 오히려 집 주변의 청풍명월이 집을 채운다. 거기서 집은 한 그루 나무처럼 자연의 일부로 존재한다.
소월은 또 이렇게 노래한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시인은 아예 문법을 던져버리고 ‘강변살자’고 한다. 강변에 있는 집에 살자는 것이 아니라, 강변을 살자는 것이다. 그에게 집은 필요하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듯하다. 강변을 보고, 느끼며 누릴 수 있는 가치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 때문일 게다. 뜰과 뒷문 밖이 어떤 모습으로 구성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 집은 물리적으로는 왜소할지 모르나, 정서적으로는 해와 바람에 닿을 만큼 넓고 높기만 하다.

집이 자연과 우주를 향해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는 모습으로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도심을 떠나 전원생활을 꿈꾸며 지은 집이 이러한 감각적인 대상을 앞에 두고도 그 가치를 모른 채,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전원에 지었다는 사실만으로 전원주택일 수는 없다. 자연의 은총을 더 소중하고 고맙게 생각할 수 있는 집. 전기불도, TV도 모두 끄고 촛불을 밝혀, 몸이 이끄는 대로 그냥 있어보라.


김억중 한남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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