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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양규의 '31번 창고' |
고독과 피곤, 쓸쓸함이 진하게 느껴진다. 마치 일상에 지친 현대인의 자화상 같다. 하지만 50년도 훨씬 더 된 작품이다. 반세기 전 시대상을 그린 그림이란 표현이 적절하겠지만 이미지는 동시대적이다.
조양규(1928-?)의 '31번 창고(1955)'다. 작품 감상의 키워드는 곧 작가의 이력이다. 파란만장한 삶의 소유자다. 진주사범을 졸업하고 부산에서 교편생활 중 제주 4·3사건에 연루되면서 1948년 일본으로 밀항을 했다. 일본서 창고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던 작가는 1968년 어느 날 문득 북송선을 탔다. 그 후 1년간 체코 유학을 한 후 행방이 묘연하다. 조국이 있지만 철저한 경계인이자 주변인이었다.
그는 북송 전 "조선의 풍경도 조선인의 풍모와 거동도 기억과 상상을 통해서 밖에 알 수가 없는 게 내게는 답답한 일이다. 북조선에서는 도구도 표현도 일본보다 자유롭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공중에 매달린 듯 어중간한 지금의 상태를 벗어나 조국의 현실 속에 싸우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4.3 사건으로 반체제 인사라 멍에 때문에 남쪽을 택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북송선을 타게 된 지식인의 고뇌와 안타까운 심정이 배어 있다. 10년간 일본 생활을 했지만 역량 있는 화가로 평가 받았지만 현실 적응을 제대로 못한 나머지 북송을 귀국으로 여긴 모양이다.
작품은 고단했던 일본 생활의 편린이다. 큰 몸통과 팔다리에 비해 머리는 지나치게 작다. 소외된 삶과 자아가 결핍된 육체 노동자를 그렇게 묘사했다. 배경은 육중한 철문이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창고 안은 칠흑처럼 어둡다. 이방인의 고단한 삶을 은유하는 듯 냉기가 감도는 분위기다. 어둠은 노동을 통해 얻은 결과물들을 빼앗아가는 통로는 아닐까. 손에 들려 있는 채워지지 않은 홀쭉한 자루가 이를 암시하고 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주인공인 이명규의 실제 모델이 조양규라는 얘기도 있다. 화가로서 확실한 족적을 남겼음에도 격변기에 이념의 제물이 돼 남과 북 모두에서 잊혀진 작가가 됐다가 근래 들어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다. '31번 창고'도 어느 미술 잡지가 선정한 '한국 근대 유화 10선'에 오른 꽤 유명세를 타고 있는 그의 작품 중 하나다.
민초들의 얄팍한 주머니 사정은 여전하다. 반세기도 더 지난 그림 속 주인공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지 하는 착각을 들게 하는 것은 괜한 생각만은 아닌 듯 하다.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예술지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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