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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억중 교수 삽화 |
다산 정약용 선생은 어사재기(於斯齋記)에서 ‘저것’에 현혹되어 그 미망을 좇느라 평생 동안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면서도 정작 ‘이것’을 누릴 줄 모르는 것이야말로 어리석고 공허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 말뜻을 뚜렷하게 그림으로 떠오르게 하는 글귀 중에, “지구는 둥글고 땅은 사방으로 평탄하니 하늘 아래 내가 앉아있는 자리보다 높은 곳은 없다”는 대목이 있다. 실제로 그가 말한 대로 눈을 감고 한없이 펼쳐진 우주 안에 위치시켜, 둥근 지구 표면 위에 나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자. 비록 몸은 왜소하나 참으로 옹골찬 기개가 뻗어나는 그림이요, 자잘한 세상을 넘어 우주에 맞닿아있는 큰 그림이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내가 앉아 있는 위치만큼 높은 곳도 없으며, 내 몸이 점유하고 있는 현재 위치가 곧 세상의 중심인 셈이다. 나를 중심으로 만물의 현상이 작동하고 일상의 삶이 전개되는 이곳, 지금 바로 여기가 “지극한 존귀함이 존재하는 곳”이요, “천하의 선이나 미가 모두 ‘이것’으로써 극치를 이루니 ‘이것’ 위에 다시는 더 할 것이 없다.”라고 주장할 만하지 않은가? 어사재라는 이름 속에는 ‘이것’의 소중함을 알고 누릴 줄 안다면 ‘저것’마저도 얼마든지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신조가 굳게 새겨져 있으니, 집주인의 서재야말로 세상과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청정도량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곳’을 소중히 여기고 그 뜻을 따라 집을 짓는다함은 어떤 관점과 태도를 이름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천상의 낙원이 될 만한 곳이 ‘지금’, ‘여기’가 아닌, ‘언젠가’, ‘저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부터 걷어내고,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지금’, ‘여기’의 조건을 잘 살피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더 적극적으로 생각을 키워 가면, ‘여기’의 조건을 살펴 ‘저기’에서 찾고자 했던 가치를 실현하면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 뜻을 되새겨봄직한 감동적인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중국어 역관을 지낸 임희지라는 분의 집 이야기를 백미로 꼽을 수 있다. 그 분은 물속에 뜬 달을 즐기려 하였으나 집터가 하도 작아 서까래 몇 안 되는 작은 집을 짓고 나니, 빈터라곤 반 이랑도 남지 않아 연못 만들기가 마땅치 않았다 한다. 게다가 울안에는 샘물조차 나지 않아 참으로 난감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처지에 굴하지 않고 사방 몇 자 안 되는 못을 기어이 만들어, 그 안에 쌀뜨물을 모아 부어 놓고 못 가에서 휘파람을 불며, “내가 수월(水月)이라 자호(自號)한 뜻을 저버리지 않으리니, 달이 어찌 물을 가려서 비추리오?”라고 노래하였다 한다. 아! 비록 맑고 깊은 물속은 아니었겠으나 뿌옇고 탁한 물속에 뜬 우유 빛 달의 정취를 즐기려했던 집주인의 풍류를 어찌 괴벽이라고만 탓할 것인가? 보잘것없이 초라하기만 한 ‘이곳’이지만, 기꺼이 즐기며 누리고자 했던 ‘저기’의 꿈을 이루어내려 했던 ‘어사’의 정신이 살아있지 않은가?
요즈음 우리들은 어떠한가? 좋은 집을 염원하는 이들은 무엇보다도 배산임수에다 기왕이면 그림 같은 전망을 누릴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좋은 땅을 찾으려 하는 것이 잘 못된 생각은 아니리라. 하지만, 그런 땅은 흔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곳일수록 땅값도 비싸려니와, 기껏 어렵게 땅을 구했어도 혹시라도 난개발이 시작되면 그 어떠한 절경도 오래가리란 보장이 없다. 땅이란 상대적인 차이는 다소 있을지언정 애초부터 명당, 길지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저것’을 찾아 헤매는 미망일 뿐이다.
오히려 내 몸이 편안하게 느끼는 땅, 내 마음이 정을 붙일만한 땅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곳’에서 ‘이곳’을 노래하면 그만이지, ‘이곳’에서 ‘저곳’을 노래하면 무엇 하는가? 다행히도 사람이 제각각 모양이나 성품이 다 다르듯, 세상의 모든 땅은 저마다 ‘이곳’만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이곳’만이 지닌 독특한 지리를 잘 살펴보기만 하면, ‘이곳’을 기쁨으로 노래할만한 것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저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향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이것’만의 진정한 가치가 눈에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이것’만의 가치를 찾는 것이야말로 ‘지금’, ‘여기’를 감사하고 은총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요, 집주인의 삶을 복되게 하는 지름길이다.
결국 ‘어사’에 뜻을 두어 집을 짓는다는 것은 ‘그런 자리, 그런 사람, 그런 집, 그런 풍경’ 사이의 일치와 조화에 건축의 목표를 두어 ‘지금’, ‘여기’를 아예 낙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지금’을 취했으니 현대성과 동떨어지지 않고, ‘여기’를 소중히 여겨 풍토성에 근거하였으니, 이보다 더 훌륭하게 시간과 공간을 경영하는 건축이 어디 있으랴. 생각의 깊이가 그쯤 되어야 대를 이어가며 “이곳에서 집을 지어, 이곳에서 노래하고, 이곳에서 곡하리라” 할 만 하지 않겠는가? 그 집에 인연이 닿은 가족들의 몸과 영혼을 편안히 뉘일 ‘이곳에서’...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happyday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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