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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억중 교수 삽화 |
지난 해 겨울 아침, 동네 모퉁이 카페를 지날 때였다. 카페 앞마당은 아주 오랜만에 햇빛으로 샤워를 하고 있었다. 햇살이 닿는 곳마다 예리한 각도로 튀어 오르는 먼지들 때문인지 카페 안팎이 한결 부산해 보였다. 길가에 내어놓은 둥근 테이블에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푸석푸석한 얼굴에 다소 지쳐 보이는 한 젊은이가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천천히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기사 파리 시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모습이니 별로 놀랄만한 풍경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날따라 내 발걸음은 쉽사리 떨어지질 않았다. 어쩌면 한 푼이라도 아껴 써야하는 외국 생활인지라 노상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느긋하게 즐기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까짓 돈 몇 푼이면 누릴 수 있는 여유를! 하지만 문득 “돈이 있다고 그럴 수 있었을까?”하는 물음을 떠올리며, 저 여유는 누구든 돈으로 살수는 있지만 아무나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자 또 한 번 부끄러웠다. 그러고 보면 여태껏 저 진부하기 짝이 없는 풍경을 수도 없이 스치고 지나쳤지만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가볍게 치부해왔던 셈이다.
아! 때늦은 감은 있으나 이제라도 저 풍경 앞에 발을 묶어 둔 내가 그래도 목석은 아니라는 작은 위안을 삼으며 천천히 그 주변을 살펴보았다. 둘러보는 여유와 따뜻해진 마음의 기운 때문인지, 세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젊은이의 까칠까칠한 턱수염에서 지친 삶의 징표를 보았고, 아직 식지 않은 찻잔 꼭지에 손가락을 댄 모습에서 바삐 돌아가는 삶의 속도를 버텨내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으며, 넘쳐나는 햇빛으로 신문 글씨가 겹쳐 보이도록 투명해진 부분과 검정색 재킷에 깊숙이 드리워진 그림자의 대비가 활기차 보였다. 그 옆에 드리워진 짙은 감색의 차양막과 커피색에 가까운 창문틀에 낀 먼지마저도 모두가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가 들고 있는 신문 속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적어도 찻잔이 식을 때까지 허락된 순간의 침묵과 여유와 평화가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날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난 감동적인 장면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정현종 시인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에서)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 갑자기 달라 보였던 것은 어쩌면 ‘저 혼자 피는 풍경’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이 그린 풍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저 혼자 피는 풍경을 마주하고도 그 진면목을 내가 그리지 못하면 풍경으로 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풍경은 어디든 널려있지만 세상을 향한 나의 시선이 문제인 것. 시인 허만하의 지적처럼 영혼이란 풍경을 마주하며 깨어나는 자기의 또 다른 모습이므로....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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