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감각의 제국(2)

김억중 한남대 건축학부교수(건축가)l승인2016.12.31 14:37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 김억중 교수 삽화

너덜너덜한 벽지, 찌그러진 비키니 옷장, 한 번도 개지 않아 눅눅한 이불,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가재도구들, 라면국물로 찌들은 방바닥, 꽁초로 수북한 재떨이 등... 이런 모습이 쉽게 그려지는 방이다. 소설 속 화자도 어둠의 자식이나 백수처럼 보인다. 세상을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고 힘없이 웅크리는 주인공 모습이 한심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어둠에 대한 지레짐작이요 막연한 거부감일 수 있다.

“나는 어둠 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어둠의 넓고 깊은 품에 푹 잠자기를 좋아했다. 어둠은 얼마나 아늑한지, 얼마나 아늑하고 편안한지, 꼭 가슴까지 잠기는 푹신한 소파만 같았다... 시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솟아 나오는 이런 저런 생각들의 수림 속을 헤쳐 다니기도 하고, 그런 채로 그냥 잠에 빠져들기도 하고, 그러다가 심란스런 꿈을 꾸기도 했다... 나는 그때 어둠을 입자로 인식하고 있었던가... 어둠은 내 속으로 들어오고, 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 섞였다. 신비스런 합일의 체험, 그 한복판에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이승우, '생의 이면')

어둠의 찬미곡! 그저 있는 그대로 들어 보라. 본 채 뒤켠에 날림으로 이어 붙인 작고 초라한 방인데, 그만의 온전한 세계요 우주다. 꿈, 사색, 휴식으로 이어지며, 한없이 깊고 느린 질서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방안 어둠 안에서, 소설 속 화자는 ‘적은 아무도 없는데, 고통은 도처에 널려있다’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동지의식을 느낀다. 어둠은 세상을 향해 비켜서거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다. 어떤가. 누구든 이런 방 하나라도 가질 수 있다면 행복하지 않은가. 어둠은 그에게 몰아내야 할 나쁜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밝고 환한 공간만이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어둠은 편안한 휴식을 주기도 하지만, 밤이 찾아오는 시간이면 세상 사물들을 검게 덧칠하여 단순 명료한 실루엣으로 남겨진 풍경을 선사하기도 한다. 강석경의 '지상에 없는 집'을 보면 주인공이 은둔처 같은 외딴 집을 찾아 방안에서 즐겨보는 어둠 속 정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오후 늦게 목욕을 갔다 방에 돌아오면 뜰의 나무가 창을 통해 맞은 편 벽에 화면처럼 비쳐져 있다.

얼기설기한 나뭇가지, 어둠 속에 박힌 숲의 영상. 어느 때 수옥은 어둠 속에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일부러 불을 켜지 않고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있기도 했다.”(숲속의 방)

시간이 흐르며 바뀌어 가는 어둠의 채도와 농도는 그렇게 다양하고 미세할 수가 없다. 뜰 앞 나무와 꽃이 견고했던 제 모습을 감추어 희미한 윤곽으로 남을 때까지 어둠이 물감처럼 번져나가는 과정을 응시하는 이에게는 초저녁에서 밤으로 바뀌어 가는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진다. 어둠의 점진적인 봉기! 그것은 보는 이의 가슴에 파고드는 관상의 대상이요 미학적 감동의 소재가 된다.

어디 어둠의 미학뿐일까. 조금만 관심을 돌려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즐겁게 누릴만한 소재가 차고 넘친다. 무관심이 늘 문제다. 새해에는 감각의 제국이라 할 만한 그대의 집에서 크고 작은 기쁨을 맘껏 누리고 살아가시길...


김억중 한남대 건축학부교수(건축가)  
<저작권자 © 미디어대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ㆍ기사제보ㆍ광고문의ㆍ불편신고ㆍ개인정보취급방침ㆍ청소년보호정책ㆍ이메일무단수집거부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학로 27 현대리조텔 1309호
대표전화 : 010-5455-4311  |   등록번호 : 대전 아 00225  |  등록년월일 : 2015. 4. 10  |  발행인·편집인 : 박기성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기성
Copyright ©2015미디어대전.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