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목마 -뤽상부르 식물원에서

김완하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시인)l승인2017.04.3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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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5)

 

지붕 하나와 그 그림자와 함께 빙빙
얼마동안 온갖 색깔의 말들이 모두
돌아간다. 몰락하기 전 오래
망설이는 나라에서 온 말들이다.
대부분 뒤에 마차가 달려 있지만
저마다 얼굴에 기백이 서려 있다.
이들과 함께 심술궂은 붉은 사자가 지나가고
그리고 때때로 하얀 코끼리 한 마리 다가온다.

가끔 사슴도 튀어나온다, 안장이 놓여 있고
그 위에 파란 옷의 작은 소녀 하나 매달려
있는 걸 빼면 흡사 숲에서 뛰노는 것 같다.

또 하얀 옷의 소년 하나 사자를 타고 있다.
사자가 이빨을 드러내고 혀를 내보이면
조그만 손에 열이 나도록 손잡이를 꼭 잡는다.

그리고 때때로 하얀 코끼리 한 마리 다가온다.

그리고 말을 타고 그들은 지나간다.
말 타기 놀이를 하기엔 너무 자라버린
밝은 옷의 소녀들도 지나간다. 한참 돌아가는 중에
소녀들은 어딘가 위를 바라본다, 저편 멀리,

그리고 때때로 하얀 코끼리 한 마리 다가온다.

회전목마가 돌아간다, 끝을 향해 서둘러 가며
돌고 돌 뿐 목표는 없다.
빨강, 초록, 잿빛이 뒤섞여 빙빙 돌아
채 시작되지 않은 옆얼굴 같다.
그리고 이따금 이쪽을 바라보는 미소 하나,
이 숨 가쁜 눈먼 놀이에 흠뻑 빠져
환희에 차 빛나는 그 미소……

 

 

회전목마를 잃어버린 순간부터 그대는 벌써 늙기 시작한 것. 그건 늘 우리에게 꿈이었으니까. 동화의 나라였으니까. 설렘이었으니까. 엄마 아빠와 함께 하던 가족의 놀이동산이었겠지. 아마도 우리가 경험한 지상의 낙원이었겠지. 그러고 보면 어른들은 모두 회전목마가 지배하던 꿈나라에서 쫓겨나온 망명정부 아니던가. 꽃의 미소와 별빛의 웃음이 가득하던 나라에서 추방당한 존재들. 어른들은 이제 더 이상 꿈도 꿈꾸지 않고 희망도 희망하지 않는 채 시간을 따라가고 있는 타자들 아닌가. 삶의 객체들이 아니던가. 어느새 싸늘하고 싸늘하게 변해버린 무표정한 이 석상(石像)들이라니.

이 시는 릴케의 ‘사물시’이다. 그의 시 가운데 이 시처럼 친근감을 주며 쉽게 다가오는 시도 없다. 그만큼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릴케는 눈앞에 펼쳐지는 회전목마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치 회전목마의 풍경을 사진 찍듯 옮겨놓은 작품. 그 객관적인 묘사에는 시인의 상상력이 개입하고 있다. 그렇게 회전목마는 돌고 돈다. 어딘가 끝을 향해서. 돌아가지만 목표는 없다. 마치 이 시 한 구절에는 우리 인생을 압축하고 있는 듯.

▲ 김완하 교수

말들, 사자, 코끼리, 사슴은 끊임없이 이어 달린다. 그건 바로 한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주와 같다. 이들은 모두 흡사 숲에서 뛰어노는 듯. 그 위에 매달린 소녀와 소년을 뺀다면. 동물 위에 올라탄 소년과 소녀들의 움직임도 눈에 역력하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은 환희에 차 빛나는 미소로 집약된다. 그러나 그 미소 한쪽은 숨 가쁜 눈먼 놀이에 흠뻑 빠져 있는 것. 회전목마를 바라보는 릴케의 시선이 집약되어 있다. 하여 릴케가 우리 생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이 가득하다.


김완하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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