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에 가자고 아내가 말한다

김완하 한남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시인)l승인2017.06.2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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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마동에 가자고 아내가 말한다
                               최하림(1939~2010) 

갈마동에 가자고 아내가 말한다
풀숲에 반딧불이들이 언뜻언뜻
머리 들고 나오는 설천과 나제통문을 지나
거창 쪽으로 십여 분 달리면 산그늘이
빠르게 내리는 곳, 한 골짜기
어둠을 풀어놓은 실개천에
가랑잎이 무시로 쌓이고 햇빛이
그리운, 사람도 조금씩은
그리운,

나는 마을 앞 당산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
한동안 덕유산을 본다 산은 어느 때고
물에 젖은 채 입 다물고 있다
침엽수들이 해마다 솟아오르면서
골짜기는 깊어가고 내를 따라 가을 물은
졸졸졸 흐르다가, 그것도 그치고 나면
일대는 무통의 적막뿐, 그뿐,
아내는 낮은 소리로 산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작아지고, 그림자들이 우리를
어둠 속으로 몰고 간다고, 나는
말없이 귀를 기울인다 말은
은빛으로 반짝이면서 저녁 하늘로
퍼져가다가 산 아래, 나무 아래, 돌 밑에 숨는다

여전히 아내와 나는 입 다물고
덕유산을 보고 있다 너무 슬프지
않고 심심하지 않게…… 한동안
어떤 사념이 머리를 흔들고 가는 것일까
바람 소리! 그림자와도 같은 바람 소리!
아내와 나는 놀란 듯 몸을 들고 일어선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밤도 어둑신히
저어기, 저렇게, 허수아비처럼 있다(606)

 

올해 봄에는 학과 학생들을 따라서 덕유산에 엠티를 갔다. 미국 버클리대에서 연구년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때. 나름 봄이 더 정감 있게 다가왔다. 그동안 내가 학생들과 덕유산으로 엠티를 갔던 것도 벌써 몇 번이던가. 그러나 이번에는 아침에 일행 몇이 서둘러 나오면서 봄의 정취 속에 시를 하나 얻었다. 덕유산의 연봉(連峰)들이 일깨워준 봄의 싱그러움으로. 예전에는 조교로 답사를 갈 때 본격적으로 시를 썼고. 교수가 되어서는 몇 번 경험이 있었으나 이번처럼 완성작 하나를 거의 구상해 온 것도 드문 일. 날은 봄이었고 복숭아 살구꽃이 한창이었고 배꽃은 한낮인데도 완전 달밤을 연출한 듯했다.

바로 그곳. 덕유산 근처 설천과 갈마동에 시인은 아내와 함께 들렀던지. 한편의 시를 남겼다. 그리고 시인은 2010년 4월에 운명을 달리했다. 그런 즉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시인의 생명보다 시는 더 길다. 그는 가고 없지만 시는 여기에 오롯이 남아 있다. 그의 시는 풍경의 묘사를 통해 세계의 존재를 표상한다. 섬세한 내면의 심리를 새기는 언어를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곧 한편의 그림이자 사진을 대하게 된다. 언제나 그 그림들은 명암의 대비 속에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 풍경들은 시인의 내면이 은은하게 비쳐진 연못과 같다.

▲ 김완하 교수

최하림 시인은 여러 해 전 충북 영동에 와서 몇 년을 지낸 적 있다. 나는 여러 차례 시인을 만났고 어느 문예지 특집으로 그에게 긴 편지를 쓴 적도 있다. 2001년 4월 어느 날 그에게 가던 길. 프라이드를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려도 쫓을 수 없는 봄이었다. 그렇게 봄은 재빨리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길가에 쏟아진 벚 꽃잎들이 달리는 차창에 휘감겼다. 그날 시인과 만나 강가에 서서는 바람이 너무 심해 사진도 찍을 수 없었다. 그래서 특집에는 사진이 실려 있지 않다. 그렇게, 시인은 나와 함께 단정한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한 채. 어느 해 훌쩍 저 세상으로 갔다. 시인이 여러 해 머물던 영동을 벗어나 경기도의 어딘가로 떠나고 난지 몇 년 뒤였다.


김완하 한남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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