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와 집주인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건축가)l승인2017.11.0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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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김억중

새 집을 짓고 살면서 어떤 집주인들은 처음에는 불편하거나 불안해했는데 살아보니까 의외로 그렇지 않더라고 할 수도 있으며, 어떤 이들은 끝내 건축가의 의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지녀왔던 주거 관습을 기꺼이 수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혀 그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황순원의 ‘일월’에 보면 “...그런데 막상 건축을 하게 되어 가끔 현장에 가 볼 때마다 눈앞에 구체성을 띠고 나타나는 건물이 자기 설계에서 유리되어 조화를 잃어감을 목도하지 않으면 안되곤 했다... 현장 감독이 제멋대로 변경해놓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이 이렇게 해야 삶이 편리하다고 하여 고친 데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인철은 그 때 자기 정신의 한 부분이 무참하게 짓밟힌 듯한 느낌을 맛보았던 것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고귀한 의지와 열정이 건축주의 불신과 몰이해 앞에 일순간 재고도 없이 스러져 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건축가에게 고문이요 형벌이다. 비록 지금은 스러져가지만 다 짓고 나면 후회할 것이 불 보듯 뻔하고 자기 판단이 결국 옳을 것이라는 믿음이 깊을수록 그 고통의 크기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건축가의 새로운 의도와 형태는 늘 집주인의 욕망과 관습이나 가치관과 부딪치기 마련이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Medici) 가문처럼 극히 예외적인 건축주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건축주는 자기 집이 건축가의 형태 실험장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근대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하다. 자신이 설계한 집들이 대규모로 변형되어 가는 현상을 뼈아프게 목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집주인들이 입주자들 취향에 따라 크게 변형을 가해 당초의 집 모습은 처참하게 변질되어 잡다한 개성표현의 전시장처럼 바뀌어져 버렸다. 그것은 분명 건축가 스스로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며, 그러한 변형가능성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집주인들이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삶의 패턴에 적응하면서 잘 살아주기를 바랐던 편이다.
대다수 근대 건축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계몽적인 입장에 서서 설계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집주인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받았으며, 결과는 낭패였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그의 건축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주택을 정밀한 기계 같은 도구로 간주하였으므로 상자 같은 순수한 볼륨을 고집하였으니 장식은 아예 불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태도는 장식이나 상징의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거 관습에 비추어보면 박스건축을 수긍할만한 여지가 없었다.

언젠가 영화감독 이창동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그에게 영화와 문학은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 질문 요지였다. 내 기억으로 영화는 만드는 사람이 완성하고 문학은 보는 사람이 자신의 상상력과 감성, 그리고 욕망을 통해 완성한다는 점이 다르다고 말했던 것 같다. 아울러 영상의 파급효과는 직접적이어서 관객에게 다가가 잘 못 휘두를 수도 있으므로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 더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나는 건축가의 작업은 어떠할까 생각해 보았다. 내가 보기에 형태를 다루는 건축가의 작업은 영상을 다루는 작업보다 그 영향력이 더 크고 직접적이지 않을까 싶다. 집은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일상의 삶이 실존하기 때문이다. 건축은 분명 형태를 다루는 건축가의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더 나아가 건축가는 자신이 건축가이기 전에 그 역시 한 사람의 사용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듯싶다.

자신이 설계한 집 구석구석에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삶을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사용자의 편에 서보아야 한다. 기소불욕이시어인(己所不欲而施於人)이라는 말처럼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다른 사람 역시 싫어하는 법이다. 건축가가 잘 새겨들을 만한 경구다. 건축 형태는 비록 건축가에 의해 다듬어지고 완성되는 것이기는 하나, 일방적인 발신행위로 끝나서는 곤란하다는 것. 집주인 또한 새로운 주거환경에 열린 자세로 이해하고 적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4차 산업혁명을 앞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삶의 조건과 정신이 담긴 집을 짓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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