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혼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건축가)l승인2018.01.1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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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김억중

건축물은 특정한 지리적 환경에 고정적으로 서있을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 존재하기보다는 환경에 대응하여 존재한다. 그 ‘자리’만의 특수한 조건에 대응하는 것이 건축이다. 그 곳에 가고 싶다는 것은 그 곳만의 고유한 지리적 가치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리는 ‘장소의 혼’(genius loci)을 잉태한다. 무심코 딛고 있던 발 아래 땅을 바라보고, 눈을 들어 땅 위에 서 있는 길, 집과 그 밖의 흔적들을 두루 살펴보면, 땅 속에 묻혀있는 그 곳만의 고유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푸른 산 뚝 끊어진/푸른 강 언덕/층층 누각 층층으로/ 흐름을 눌러.../거나한 기 덜 깬 채/풍경 저무니/달 밝은 호수 위를/ 차마 못 떠라.”(손중돈, 영남루, 1463-1529)

동일한 자연요소라 해도 관계를 이루고 있는 지형, 지세에 따라 그 정경과 감흥은 제각각 다르다. 시 속의 영남루는 산과 강이 단절을 이루는 지세를 누르는 모습으로 층층이 앉아 있다. 시인은 집과 땅의 형세 사이의 교묘한 조화미를 간파하고 있다. 누각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자연의 지형, 지세를 보완하고 있는 모습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누각은 마치 부처님 눈에 점을 찍어 혜안을 그려내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묘수와 다를 바 없다. 누각에서 달 밝은 호수를 바라다보는 풍광을 얻었는가 하면, 멀리 떨어져 산세와 어울리는 누각을 보는 모습도 아름다울 것이니, 땅과 사람이 한데 어울려 정성을 들여 ‘그 자리에 그 모습’을 이룩해낸 극적인 정경이다. 누각을 지은 건축가에게 지형, 지세는 대지 고유의 메시지요 장소의 혼을 불러오는 매체였다.

“달은 높이 떠서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연기는 벽들의 벌어진 틈과 구멍을 통해 점점 더 많이 새어나왔고, 안개처럼 깔린 연기에 달빛이 어렸다.... 이곳에서는 인간 정신이나 마찬가지로 달과 해도 다른 곳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달빛이나 햇빛이 거대하면서도 건실한 덩어리에 반사되어 비치기 때문이다.”(괴테, 괴테의 이탈리아기행)  

괴테가 본 로마 유적지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디서나 뜨는 해와 달이건만, 대지 특성에 따라 고유한 정감이 다르다고 말한다. 로마의 펑퍼짐한 지형을 따라, 건물 윤곽이 단순하고 굳건한 벽면에 비친 광활한 빛의 효과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도 건축은 지형을 표현하고 있었다. 수평으로 펼쳐진 땅, 물, 초목, 바위, 하늘, 태양, 그리고 지형!

그 대지만이 지니고 있는 ‘그 자리’의 힘을 점지하는 메신저들이니, 있는 그대로 그 장소의 혼을 드러내는 작업이야말로 건축의 본령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집을 잘 지으려거든 그 장소만의 지형, 지세에 새겨진 고유한 혼이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읽는 데서부터 시작할 일이다.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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