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거(寄居)와 유람(遊覽)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건축가)l승인2018.07.1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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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김억중

옛 선비들은 평생 몇 채의 집에서 살았을까? 우선 자신이 태어난 생가가 한 채 있었을 것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르면 한양에 기거할 집이 또 한 채 필요했을 것이며, 지방 수령으로 발령을 받으면 그 곳에 머무를 관사가 한 채 이상 마련되어 있었던 데다 자칫 당쟁에 휘말려 유배라도 가게 된다면 거기 또 한 채가 불가불 있었을 터이니, 이렇듯 출사한 선비들은 한반도 어느 곳이든 적어도 서너 군데 이상의 집을 자의반 타의반 옮겨 다니며 노마드 못지않은 삶을 살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생가와 외지의 임직 공간 사이를 끊임없이 오고가야 했던 선비들에게 평생 기거(寄居)와 유람(遊覽)의 반복은 기꺼이 받아들여 기왕지사 즐길 줄 알아야 했던 일상생활의 기본 패턴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농암 김창협 선생[1651-1708]의 연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21세에 송경의 천마산으로부터 시작되는 명승유람과 29세에 응암에 터를 잡고 집을 지으신 이래 몇 차례 이어지는 집짓기와 기거 이력은 물론 잠시나마 외유중 독서하고 담론을 즐겼던 한거(閑居) 경력까지 구체적으로 기술되어있다. 물론 대다수 선비들의 연보에서 빠지지 않고 기록된 내용 중에는 화려한 관직 이력이 아무래도 첫 째로 꼽히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농암 선생의 경우가 매우 이례적인 것은 자신의 기거와 외유 경력이 학벌과 명예와 관련된 스팩 못지않게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9세 외할아버지를 따라 해주 임소로 향했던 첫 외유에서부터 58세 배를 타고 물고기 구경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몽와공을 모시고 묘적사에 다녀오신 후 다시는 돌아오실 수 없는 곳으로 가시기까지, 선생의 연보를 꼼꼼히 읽어가다 보면 결국 선생을 조선의 커다란 선비로 키웠던 8할이 무엇이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평생 동안 승경을 향해 움직이거나 집안에 기거하며 멈추면서, 우주로 향했던 외향적 시선과 자신의 내면으로 투영했던 내향적 시선을 교차하고 반복했던 유람과 기거, 그 길항의 가역반응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러니 너희도 기꺼이 유람하고 기거할만하지 않겠느냐는 듯 선생의 연보는 평생의 화학반응 실험리포트처럼 빼곡하게 쓰여 있다.

어쩌면 선생에게 생애 최초로 송경 명승유람을 시작했던 21세는 대자연, 그 살아 있는 경전을 대면했다는 점에서 선비로서의 삶에 일대 기념비적인 한 해였으리라 여겨진다. 그로부터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배우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지를 단박에 깨달았을 것인즉, 세상만물의 이치와 신비를 고스란히 내장한 산수를 유람하는 즐거움과 선비의 심상을 투영한 소우주 같은 집에 유숙하며 주거의 기쁨을 맛보았을 터이니 어찌 그 수고로움을 마다할 수 있었을까.

비록 누추하나마 집 안팎을 넘나들며 만나는 온갖 경물(景物)치고 자신이 벼렸던 화두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 없었을 것이며 그보다 더 소중한 스승이 또 어디 있었겠는가. 그렇게 집안에서는 바깥 유람을 꿈꾸었고 집 바깥에서는 떠나온 집을 그리워했으니 마음속으로 세상천지 집 아닌 것이 없었을 터이다. 그러므로 기거와 유람에 뜻을 두어 제대로만 수행한다면 공부가 따로 없지 않겠는가?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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