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작아도 되는 진짜 이유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건축가)l승인2018.09.1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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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김억중

서애 유성룡 선생이 쓰신 원지정사기(遠志精舍記)를 차근차근 읽다보면 집이 협소해도 괜찮은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그 핵심을 간파할 수 있다. 집 바깥 먼 곳을 향해 마음의 방향을 얻으면 그것을 즐길 줄 아는 것이 자연스런 수순이요, 즐거워할 줄 알면 그 크기가 비록 작다 해도 협소한 느낌마저 잊어버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 먼 것은 가까운 것이 쌓여져 나아간 것이요, 뜻[志]은 마음이 방향을 잡은 것이다. 상하 사방의 가없는 공간으로 보나, 아득한 옛날로부터 흘러온 지금까지의 시간으로 보나, 저 우주란 참으로 멀고 멀다. 내 마음이 방향을 얻었고, 방향을 얻은 까닭에 완상(玩賞)하는 것이며, 완상함으로써 즐거워하는 것이 있으며, 즐거워함으로써 자연 잊는 것이 있다. 잊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집의 협소함을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서애집, 제 17권]

이조 선비들처럼 집의 개념이 집 바깥을 향해 단절되지 않고 투명하게 열려있어 집 주변 너머의 풍광을 모두가 공유할만한 공공의 가치로 소중히 여길 수 있다면, 집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도 된다. 굳이 자신이 다 소유하지 않아도 즐기는 데 서로 방해 받지 않을 정도의 작은 크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각자 집을 짓되 자연 경관의 질서에 누가 되지 않으려는 태도는 기본으로 요구되는 덕목이요, 혹여나 너무나 튀게 지어 자신의 집으로 인해 다른 이들의 집에서 보기에 흉한 꼴로 드러나지 않으려는 노력 또한 상호 존중할 줄 아는 배려 또한 최소한의 예의처럼 통용되었을 터.

여기서 집은 배경처럼 그저 풍광의 일부로 존재할 뿐 스스로 뽐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자연의 풍광 속에 점 하나를 찍듯, 명재 선생의 ‘거사암(居士庵)에서 자다’라는 시 속의 작은 집은 어둠이 내렸어도 그 작은 실루엣을 다소곳이 숨긴 채 외로운 등불 하나가 마치 불공드리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전이되어 비쳐진다.

온갖 꽃들 떨기지어 만발했는데 / 離披百花叢
그 속에 작은 집 한 채 있다네 / 其中有小室
풍경 하나에 등불 하나로 / 一磬復一燈
밤마다 외로이 불공드리네 / 夜夜獨拜佛

어디 그 뿐인가. 비록 작은 집이지만 의식의 촉각은 저 멀리 방 바깥 너머 우주 스케일에 맞닿아 있는 예들은 선비들의 시속에서 얼마든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우의 ‘눈보라 치는 밤에’라는 시 속의 집을 살펴보면 시인의 의식과 더불어 작동하는 상상력과 시각과 청각의 촉수는 방안에 머무르지 않고 방 바깥 너머 까지 확장되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빈창에 눈보라 치고
촛불 그물거리는 밤
달빛에 걸러진 솔 그림자
지붕머리에 어른댄다.
방 깊어 알괘라!
산바람 지나가는 줄
담 너머 서석거리는
으스스 댓잎소리...”
(이우, 1469-1517)


물론 시인의 남다른 감수성이 있어야 저런 극적인 순간을 맞이할 수 있겠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럴만한 집과 그럴만한 바깥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이내 창밖 넘어 우주와 소통하는 일련의 장치들이 집 안팎의 공간구조 안에 정교하게 짜여있는 그런 집!

더불어 이런 집에 사는 아이의 삶이 어떠할 지를 상상해보라. 지극정성으로 아이를 보살핀다는 엄마의 닦달 없이도, 결연한 마음을 굳이 먹지 않아도 그냥 우주에 이미 동참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로부터 연유되는 사유 영역의 무한 확장은 따 놓은 당상 아닌가.

그런 집다운 집만으로도 아이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우는 데 얼마나 큰 탄력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면 집이 어떠해야 할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집이 아무리 화려하고 크더라도 아이의 의식이 방안에 갇힐 수밖에 없는 공간구조보다는 비록 집은 작지만 집 바깥을 향해 의식이 크게 열릴 수 있는 집을 선택하는 것이 백번 옳다.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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