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의 미학

김억중 한남대 건축학부 교수(건축가)l승인2019.03.16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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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김억중.

주변머리가 없는 터라 여간해서 주례를 서지 않는 편이지만 아주 예외적으로 KBS PD 한 분의 결혼식 주례를 선 적이 있다. 그녀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타고난 감수성도 대단한데다 제대로 된 TV 프로그램을 만드느라 어찌나 치열하게 묻고 공부를 하는지 내심 감동을 받은 터였다. 그런 분이 내게 주례 부탁을 하니 어찌 거절할 수 있으랴. 불행히도 평소 매뉴얼처럼 잘 준비된 주례사가 없어서 이를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하던 끝에 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구름과 산이 모두가 희니 雲與山俱白
그 모습을 구별할 수 없네 雲山不辨容
구름은 가고 산 홀로 서니 雲歸山獨立
아! 일만이천봉이라 一萬二千峰

 

시를 읽어내려 가다보면 구름이 걷힌 금강산이 눈앞에 장관으로 펼쳐진다.

금강산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의 빼어난 형상, 웅장한 스케일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다. 제아무리 빼어난 용모를 지닌 금강산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박제된 풍경이라면 아름다운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얼마나 진부하고 지루한 풍경이겠는가. 오히려 천태만상의 구름 형상에 가려졌다 일순간 드러난 금강산 모습이야말로 시시각각 변모를 거듭하는 극적인 장면이 아닌가. 이를 정확하게 포착하여 잠깐 사이 벌어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만으로 커다란 감동을 이끌어낸 시인의 미적 감수성과 기교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러고 보면 산과 구름은 그 자체의 형상만으로 감동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배경이 될 때 비로소 그 존재가 빛나는 법이 아닌가. 고정된 것(산)과 변화하는 것(구름) 사이의 끊임없는 교류와 조합이 미적 감흥의 원인인 셈이니 말이다. 경쟁하듯 둘 다 동시에 멈추어 있거나 둘 다 함께 움직여도, 대상/배경 사이에서 생성되는 그 어떠한 감동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생각해보면, 신혼부부가 서로 어떠해야 하는지도 선명해진다. 남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때면 부인이 그 은은한 배경이 되어주고, 부인이 주인공으로 주목 받아야 할 때는 남편은 커다란 나무처럼 그 배경이 되어주려 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가끔씩은 내가 봐도 꽤 괜찮았던 주례사를 떠올리며, 요즘도 이들 부부가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를 기원하고 있다.

 

풍경, 사람의 생애가 그러 하듯 내가 보기엔 건축도 그 미학의 원리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건축물 하나만을 똑 떼어 놓고 생각한다는 것은 미학의 근간에서 멀어지는 태도다. 오히려 건축물이 배경, 또는 맥락(context) 속에 어떻게 상생하며 존재해야 하는가가 관건이다. 건축물이 저마다 뽐내는 방식으로 이웃한다면 그 어느 것도 조화로울 수 없다. 뽐내야 할 자리에 있는 건물은 그 형상이 잘 드러나도록 하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실컷 뽐낼 줄 알면서고 기꺼이 쿨하게 자제할 줄 아는 미덕도 중요하다. 그런 경우라면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라 하더라도 뛰어난 배경의 역할을 잘 해낸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을 얻는데 이바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억중 한남대 건축학부 교수(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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