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여명(黎明)을 보았는가

박기성 기자l승인2019.08.23 10:14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 김종영, 세한도(歲寒圖)

우성 김종영(1915~82) 선생의 세한도(歲寒圖)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일 먼저 세잔(Cézanne)의 나무가 보이고 당연히 추사(秋史)의 세한도(歲寒圖)가 떠올려지며 그 뒤로 자신이 살았던 산동네가 겹쳐진다. 이파리는 다 떨어지고 까치 한 마리조차 다 떠나버린 적막한 산동네는 헐벗은 뼈대만 남아, 저마다 자신의 존재를 무릅쓴 용트림으로 혹한 칼바람을 이겨내고도 남음이 있어 보인다. 추사 선생의 세한도만큼이나 화폭이 서늘한 건, 두 분 사이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마음이 통한 탓일지도 모른다. 세잔 선생에게 쌩트 빅투와르 산(Mont Ste. Victoire)이 면벽이었다면 김 선생에게 세잔과 추사는 동서를 오고가며 스스로 넘으려했던 큰 산이 아니었을까 싶다.

선생은 서예 수련은 물론 추사의 옛 그림을 꾸준히 임모(臨模)하며, “이 뭐꼬?”를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되뇌며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날고 또 날다 지치면 되돌아와 다시 저 세한도나무 가지, 저 언저리 어디쯤에 머물렀을 터. 인고의 세월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내공의 길을 오고가다 때가 무르익어 한 시대의 여명을 보았을 즈음, 이 때다 싶어 자신만의 길을 찾아 홀연히 떠났던 것은 아닐까. 오늘 밤 선생을 떠올리며 이 땅의 건축가들에게도 여명을 보았는가를 물어본다.

나는 신기루 이미지를 떠올릴 때마다 동시대 건축가들이 다함께 겪어온 질곡의 역사를 생각한다. 돌이켜보건대 우리 근대 건축의 여정은 경제개발의 기치아래 실로 숨 가쁜 세월로 점철되었다. 모더니즘에서 다시 포스트모던으로, 다시 해체로 이어지기까지 숫한 건축사조의 이입과 명멸이 반복되어 왔다. 어쩌면 서구 근대건축의 발 빠른 변신의 도정을 뒤따라가며 수용과 대응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교훈을 정리하거나 평가하지도 못한 채 늘 허덕여왔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자학일까? 비평의 거리를 유지할 수 없었던 저간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밀려드는 서구사조들은 대안의 땅처럼 크고 밝아 보였다.

그렇게 이 땅의 건축가들이 르 코르뷔지에를 비롯한 근대 건축가들의 자산들을 ‘모방에서 모반까지’ 질근질근 섭렵하기도 전에 난데없이 신기루의 땅 크로커랜드가 지평 위로 떠올랐고 주저함 없이 그리로 향했던 것 아닌가. 결코 시대의 여명을 볼 수 없는 불모지를 향해! 그리 발걸음 하느라 분주하여 근대건축이라는 미로를 통과하지 않은 채, 입구 근처를 맴돌다 대뜸 나와 버렸으니, 단련했어야 할 체질은 태생부터 가볍고 허약할 수밖에 없었으며 갈피를 못 잡을 만큼 귀도 얇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그곳으로 향하는 대열에서의 일탈이란 곧 실패를 뜻했다. 세월이 흘러 거장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대다수가 공유할만한 패러다임이 무너져버린 근자에 이르러, 대중들은 건축이 패션이라 말할 만큼 문화적으로 성숙(?)되었고 그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흉내라도 내어야하는 분위기가 도처에 창궐하기에 이르렀다. 들뜬 대중들은 이제 크로커 랜드야말로 유토피아라도 되는 듯 그리로 향하는 것을 진보로 여기는데 주저함이 없게 되었다. 그럴 듯 해 보이는 아방가르디스트(avant-gardiste)의 재촉이나 유혹이라고나 할까... 집 안팎에는 아무런 저항 없이 서구 모더니티를 은유하거나 차용한 기호들이 범람하고 있는 실정이다. 도시마다 거리는 세계화의 기치에 걸맞게 때 묻은 기억도, 역사도 말끔히 씻어내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건축가들은 물론 학교 학생들의 작품 속에도 서구의 최신판 형태언어들이 내면화되지 않은 모습으로 덧씌워진 채 환상은 실험정신의 고취라는 명분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그 위용을 더해가고 있다. 모든 길은 크로커 랜드로 통하고 있었다.

외부로부터 밀려드는 이미자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떤 이들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대세를 좇아 편하게 옷만 갈아입으면 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갈피없이 어제 했던 말들을 쉽게 부정하고 오늘도 어차피 내일의 부정을 위해 복무하고 있다. 요컨대 최신의 서구 사조 어휘와 기법만을 차용하여 상업적 인기에 영합하기 쉬운 오늘날의 건축세태는 체질적으로 가벼울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 틈새에서 진정한 감흥(emotion)보다는 쎈세이션(sensation)을 갈구하며 작가의 변신을 미덕으로 치부하고 있는 세태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외부환경의 급속한 변화를 이유로 작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더 이상 작가의 능력과 성실성을 가늠케 하는 척도가 아니라 오히려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십상이다. 본질은 묻혀버리고 껍데기가 진실인양, 비록 슬픈 일이기는 하나 이것이 이 시대 건축계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요 뼈아픈 단면이다.

모두가 그러려니 약속했던 곳, 최음의 땅 크로커 랜드! 정체불명의 대지 크로커 랜드! 석양녘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색이 드러나는 허무와 망연자실의 땅, 크로커 랜드! 예정된 좌절의 땅 크로커 랜드! 그 미몽을 벗어던지고 저 편 너머의 진실에 다다르려는 이가 이토록 보기 드문 것인가. 자신이 하는 일이 역사 속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 자기 길을 똑바로 가려는 이들이 왜 이토록 찾아보기 힘든가.

하지만 어느 시대나 그러하듯 세태를 좇는 건축가와 이를 막고 품는 건축가가 늘 있기 마련 아닌가? 건축역사는 대부분 크로커 랜드로 향하고 있는 동시대 건축가들의 대열에서 벗어나 올곧게 자기 건축의 길을 가는 이들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의 체질화된 반세태 미학 속에는 건축 역사 안에 자신의 건축을 어떻게 정위해야 하는가를 묻는 치열한 작가정신을 엿볼 수 있다. 남들이 과거 유산의 영화에 자신의 몸을 편히 기대거나 재기 발랄한 미적 유희에 매달릴 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로커 랜드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이들. 한국의 건축, 그 건강한 미래는 시대의 여명을 똑바로 읽으려 세태를 정면으로 가로지르고 물살을 거슬러 막고 품는 이들에게 달려있다. 오늘 밤에도 김종영 선생을 면벽에 두고, 나 또한 시대의 여명이 깃든 세한도를 그려보고자 나만의 영토, Republic of Lost Angelos에 깃발을 내걸고 바깥에서 불어오는 미친바람에 맞바람을 놓느라 시시덕거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미치도록 미친 밤이다.


박기성 기자  happydaym@hanmail.net
<저작권자 © 미디어대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기성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대전광역시 유성구 봉명동 551-7 한진오피스텔 315호
대표전화 : 010-5455-4311  |   등록번호 : 대전 아 00225  |  등록년월일 : 2015. 4. 10  |  발행인·편집인 : 박기성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기성
Copyright ©2015미디어대전.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