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뿌리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과 교수(건축가)l승인2019.10.0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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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Paris)를 여러 차례 여행하며 내가 부러워했던 것은 멋진 집들도 세느강도 에펠탑도 아니었다. 더 큰 관심이 갔던 것은 어디서나 잘 드러나 보이는 ‘미관’보다는 도시 이면에 숨겨져 있어, 잘 읽히지 않는 ‘삶의 질’과 관계있는 문제랄까. 이를테면 파리 시청 주변을 걷다가 거리 곳곳에 크고 작은 도서관이 30여개 이상 차고 넘쳐나는 것을 보고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 숫자라면 어떤 신간 서적이든 프랑스 전국 도서관에서 1권씩만 소장하더라도 무조건 초판은 매진될 터이니,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좋은 책을 소신 출판할 수 있는 인프라가 탄탄하게 갖춰진 셈이 아닌가.

더욱더 놀랐던 것은 웬만한 도서관마다 소장하고 싶을 만큼 정성들여 만든 만화집(bande-dessinée)이 장르별, 작가별로 분류되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으니 이처럼 뿌듯한 매력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A4 크기에 두터운 표지로 양장 제작된 만화집 속에는 유럽 곳곳의 명품 도시나 건축물들이 멋진 배경으로 그려져, 또 다른 형식의 문화 컨텐츠로 확대 재생산되는 현상을 보며,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선진국의 브랜드 가치를 이끄는 동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순간 우리나라가 OECD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랐다는 얘기가 얼마나 아득하고 공허하게 느껴지던지... 문화 인프라의 커다란 차이는 하루아침에 극복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자괴감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 때만큼 내 생애 만화를 한꺼번에 많이 본 경험이 따로 없었으니 얼마나 행복했던가. 지금 생각해봐도 그 시절이 그립고 또 그립다. 그 당시 훌륭한 작가들의 만화집에 그려진 건축물들은 대충 얼버무려 그려진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디테일까지 꼼꼼하게 그려진 것들로 그들의 장인정신에 감탄할 지경이었다.

그 당시 보았던 만화집 중에서 내 눈에 제일 먼저 띠었던 것이 바로 위의 그림판이다. 추측컨대 벨기에 브뤼셀 광장과 이태리 시실리 광장을 그려놓은 그림판인 듯한데, 무엇보다도 광장을 둘러싼 건물 모습이 충격적일만큼 커다란 대비가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 창의 크기나 모양도 확연하게 다른데다 지붕 경사도도 차이가 난다. 위 그림은 기둥 골조 사이로 안팎이 투명하게 열려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만 아래 그림은 벽면으로 이루어진 건물 안과 밖이 서로 단절되어, 닫혀있는 형상을 보이고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위 그림에서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두터운 외투를 걸친 채 분주히 오고가는 모습이지만 아래 그림에서는 모두들 건물 그림자 안으로 숨어들었는지 햇빛이 작열하는 광장 안에 사람 하나 볼 수 없다.

이처럼 두 도시의 서로 다른 경관과 일상의 삶조차 서로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 일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안과 밖의 경계를 짓고 특별한 관계를 이루어낸 데는 어떤 조건들의 차이가 있었을까? 실제로 위 그림은 대륙 북쪽 도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경관인데 반해, 아래 그림은 지중해 주변도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풍광이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그 전형적인 차이야말로 아주 오래 전부터 서로 다른 사유의 뿌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건축은 주어진 자연조건에 따라 그 형태의 시원, 또한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오버 깃을 세우고 우수에 가득 찬 모습으로 걸어가는 알렝들롱(Alain Delon)이 나오는 영화를 보라. 프랑스인들은 한 뼘의 햇빛이 그리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해만 뜨면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던져버리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광욕을 즐긴다. 그런 만큼 그네들 집은 빗물이 잘 흘러내려 배수가 잘 되고 가능한 햇빛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그러므로 지붕은 경사지고 창문은 크면 클수록 바람직하다. 구조적으로 꼭 필요한 요소만을 기둥으로 처리했으니, 창문을 최대한 크게 낼 수 있으므로 매우 합리적인 선택인 셈이다. 유럽 북부로 갈수록 창문을 크게 내거나 그 숫자가 많은 이유도 집들이 기둥구조를 선택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한편, 지중해 지역은 어떠한가? 연중 비오는 날보다는 직사광선의 위력이 대단한 나라가 아닌가. 그들은 오히려 햇빛보다는 선선한 그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두터운 벽체로 그늘이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합리적인 구조 방식인 셈이다. 그들 집은 창문을 굳이 크게 할 필요도 없고 경사 지붕을 둘 필요도 없다. 집안이 건조하도록 통풍만 잘 되면 그만이다. 만화 속 광장 주변의 건축물들이 창문의 양보다 벽면의 양이 더 많아 폐쇄적이며 내향적이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이처럼 유럽 중북부 지역과 지중해변 지역 건축의 확연한 차이를 알고 살펴보면 그 공통된 조건에 대한 고민의 흔적과 다양한 해법을 살펴볼 수 있는 여행의 재미가 솔솔 하다. 기후의 차이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건축시스템의 근본적인 차이는 산업혁명 이후 20세기 초까지도 꾸준히 이어져 왔다. 하지만 근대 건축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서로 다른 기후 조건과 관계없이 쾌적한 내부 공간을 실현하면서부터 지역마다 고유하면서도 섬세한 차이를 지워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인위적인 설비에 의존한 고비용 에너지 소비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루면서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우리는 저 두 개의 그림판을 들여다보며 건축 형태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보고 기술의 진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루어야 할지, 건축의 근본부터 되짚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과 교수(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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