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녀의 '고암 딸 돌잔치'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l승인2016.03.12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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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종녀의 고암딸 돌잔치

장안의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친구 손녀 딸 돌잔치에 초대 받아 자리를 함께 했다. 술잔이 몇 순배 돌면서 취흥이 고조됐다. 좌중을 압도하던 한 화백이 단박에 취필을 휘둘러 돌잔치 정경을 묘사했다. 그리고 사람마다 호를 적었다. 사진이나 진배없는 돌잔치 기념 기록화를 완성한 것이다.

기록화를 그린 주인공은 월북화가 청계 정종녀(1914-1984)다. 제목은 ‘고암 손녀딸 돌잔치(1949)’ 라고 하면  맞춤할 것이다. 즉석에서 빠른 붓질로 거칠게 완성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 탓인지 왁자지껄한 술자리 분위기가 한껏 강조돼 전해지는 듯하다.

쓰여진 호를 따라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자. 색동옷을 입고 고암의 품에 안긴 어린애는 기록화의 주인공인 고암의 손녀딸(경인)이다. 손녀딸 오른쪽은 청전 이상범의 아들 이건영이다. 청계의 스승이 청전이다 보니 건영과 자연스럽게 합류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건영의 오른쪽에는 일관 이석호, 운보 김기창, 숙당 배정례가 차례로 자리를 하고 있다. 세 화가는 이당 김은호의 제자이고 숙당은 유일한 홍일점이다. 한복차림에 다소곳한 자세가 좀 불편해 보인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하지 못한 당시 사회상의 반영은 아닐까.

청계 왼쪽에 앉아서 술을 들이키는 화가는 청강 김영기다. 청강은 고암의 스승이자 국내 최초로 사진관을 운영했던 해강 김규진의 아들이다. 청강의 왼쪽 사람은 호가 흐려져 있어 안타깝게 확인이 불가능하다.

화가들이 고암의 집에 모인 이유는 또 있다. 새해를 맞아 정담이나 나눌 요량으로 고암이 손녀딸 돌잔치를 핑계 삼아 절친인 청계· 운보를 비롯해 여러 화우들을 초대한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날의 만남이 영원한 될 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고암은 다음해 도불(渡佛)을 결행했고, 청강과 이건영·이석호는 한국전쟁 중 월북을 했다. 그후 고암은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고국에 있는 운보조차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생전에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했다.

무심한 세월 앞에 예술가의 명성도 절친의 인연도 매정할 뿐이다. 덩그러니 남은 빛바랜 그림 한 점이 그날의 정취를 전해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이 마치 이를 두고 한 것 같다.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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