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대한 경의

김억중 한남대 건축학부 교수l승인2016.04.10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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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억중 교수 삽화

당호(堂號)와 기문(記文)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라는 바슐라르의 말에 비추어 본다면, 집은 추억의 질료에 다름 아니다. 흘러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늘 마주치는 지점에 ‘그 때, 그 집’의 추억이 있어 뼈에 새긴 정표처럼 그대의 심금을 울려준다. 집은 우리 모두에게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좌표다.

누구든 집안 어느 구석엔가 깊은 추억이 있어 혼자만의 분신을 키워 호적에 자식처럼 등재한 빛바랜 추억이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언제든 스스로 자신의 신원을 조회할 수 있는 곳, 거기가 바로 그대의 진정한 고향이요, 집이다.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는 정거장에는 옐로우 리본처럼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그렇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집이라 해서 집다운 집이라 할 수는 없다. 그대 마음속에 늘 펄럭이는 깃발처럼 ‘그 때, 그 자리’의 각별했던 추억의 힘이 내장되어 있지 않다면 그 집은 집이 아니다. 실로 집의 힘은 위대하기 그지없으므로 그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 수 없다.

불과 100년 전만해도 집을 짓고 나면 으레 건축의 배경이나 동기, 과정에서부터 집주인의 철학과 미학에 이르기까지 그 뜻을 상징할만한 당호를 친구나 당대의 문호로부터 받아 편액을 걸고 그 기문을 청해 집에 대한 마땅한 경의를 표함은 물론 집주인의 업적을 대대손손 기리려 했던 아름다운 이벤트가 건재했었다.

하물며 이름을 잘 드러내지 않고 은거했던 스님들조차도 당호와 기문이 다소 부담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윤절간(倫絶磵)이라는 스님이 지었고 목은 선생이 기문을 썼던 송풍헌(松風軒)의 경우를 보면, 극단적이기는 하나 당호의 유무를 사람과 금수 사이를 구별할만한 기준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은 스님이 그저 외물(外物)을 대할 때에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만 하면 될 것이니, 마음이 동요될 것이 있겠으며, 무엇을 본다 한들 마음이 움직일 까닭이 있겠느냐며 이처럼 반문한다. 소나무 사이로 부는 맑은 바람소리를 일상생활 속에서 청정(淸淨)하게 받아쓰기만 하면 될 것인데, 굳이 솔과 바람을 당호로 삼아 숭상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다른 초목들과 달리 늘 푸른 솔의 자태와 다른 소리들과 달리 만물을 길러 주는 맑은 바람소리를 일상생활 속에서 청정(淸淨)하게 받아쓰기만 하면 될 것인데, 솔과 바람을 굳이 거론하여 숭상할 것이 또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그러니 기거하는 몸이 있고 출입하는 집이 있는데도 내걸 편액이 없고 드러낼 이름이 없다고 한다면, 뭇 금수(禽獸)와 비슷하게 되지 않겠는가... [송풍헌기(松風軒記) /목은문고 5권]

하지만 당호를 쓴 편액을 걸어두고자 했던 것은 가옥의 외관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보다는 집주인으로 하여금 당호에 새겨진 대의(大義)를 두고두고 기리며 사고와 행실을 그 뜻과 격에 맞도록 일상의 삶을 흐트러짐 없이 살피려함에 있었다. 그리하여 당호에 걸 맞는 삶을 누리려는 이들이 모여 골고루 솔과 바람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므로, 그런 집이 있는 것만으로도 집주인은 물론 보다 많은 이들이 모두가 감사한 마음을 지닐 만큼 뜻깊은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김억중 한남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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