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충만

김억중 한남대 건축학부 교수l승인2016.04.2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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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억중 교수 삽화

“우툴두툴한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있으면 창밖으로 지나가는 미친 바람소리도 한결 부드럽게 들린다. 이 방에 나는 방석 한 장과 등잔 하나말고는 아무 것도 두지 않을 것이다. 이 안에서 나는 잔잔한 삶의 여백을 음미해 보고 싶다.”(법정, 오두막 편지)

법정 스님 방에 가보지는 않았으나, 텅 빈 충만 속에 행복해 하는 스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도연명 시중에, “집 안에 잡된 것이 없고(戶庭無塵雜), 텅 빈 방에 한가한 이 몸(虛室有餘閑)”이라는 구절의 이미지가 그대로 겹쳐진다.

텅 빈방인데 무엇이 충만하다는 것인가 ? 창문에 스며드는 단아한 햇살. 방안에 스며드는 꽃 내음. 지저귀는 새들의 청명한 소리. 방바닥의 따뜻한 온기. 창호지 문살에 어른거리는 잎새의 떨림. 그윽한 향내가 나는 찻물 따르는 소리. 사각사각 눈 내리는 소리.... 이런 것들이 찾아 들어와 방을 채우는 것이 아닐까 ? 그래서 스님은 자신의 거처를 물 흐르고 꽃 피는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이라 불렀을 것이니, 집에 대한 사유의 깊이를 헤아릴만하다. 그의 맑은 영혼이 투영된 공간 속에는 부질없는 껍데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물건에 대한 집착도, 장식에 대한 애착도, 살림살이에 대한 집착조차도... 비울수록 채워진다는 깨달음이 일상 공간으로 전화된 모습이다.


김억중 한남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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